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사 관련 정보 (문단 편집) === [[메이지 유신]] === 왕(천황)을 드높이고, 외세(서구)를 배격한다는 [[존황양이]](尊皇攘夷)[* 존왕양이(尊王攘夷)라고도 한다.]를 명분으로 내세운 [[메이지 유신]]을 통해 에도 막부가 막을 내리고, [[대정봉환|다시 천황에게 실권이 돌아오게 된다]]. 일본의 정신(혹은 고유한 것)을 바탕으로 서구의 기술을 활용한다는 화혼양재(和魂洋才)를 기본 골자로 하여 매우 빠르고 성공적인 근대화에 성공하였으며, 당시 일본은 세계열강의 반열에 들어섰다. 다만 근대화 성공을 무작정 일본의 위대함, 일본의 저력 등으로 포장하는 것은 바람직한 시각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서태평양 일대를 식민화하던 미국이 남북전쟁으로 잠시 손을 뗀 시기를 놓치지 않고 잘 이용한 측면도 존재한다. 일본이 근대화를 하던 1860~70년대에 하필 서양 열강들이 [[남북전쟁]], [[그레이트 게임]], [[보오전쟁]], [[보불전쟁]], [[크림전쟁]], [[이탈리아 통일]] 등의 혼란상을 겪었기 때문에 일본 내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본이 아무런 역량 없이 단순히 시기만 잘 타고났다고 보는 시각 역시 곤란하다. 그렇게 따지면 조선 역시 시간이 없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도 막부는 이미 [[흑선내항]] 이전부터 소위 [[난학]]이라 부르던 서양의 학문을 배우는 기관을 설립하였고 농업, 상업, 무역의 발달로 부의 축적을 이루어 일개 번들이 서양군함 수척을 사들여 굴릴 정도로 근대화를 일궈낼 기초 역량이 뛰어났다. 이렇듯 일본은 19세기 중반 이전에도 근대화를 받아들일 자본적, 정신적 준비가 되어있었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근대화는 운과 실력 모두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역량이 준비된 나라에 약간의 운과 시대적 상황도 따라주었다고 보는 시각이 객관적이다. 메이지 신정부는 1869년 판적봉환과 도쿄전도, 1871년 폐번치현, 사민평등 등의 개혁을 추진하고 자유민권운동이 일어나면서 1890년에는 국회을 개설, 1889년 헌법도 제정하였다. 식산흥업정책을 표방하며 산업 발전에도 박차를 가하면서 관영 공장과 철도, 제철소 등을 세우고 은행제와 금융제를 도입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